책소개
‘문화’에 대한 새로운 정의
문화사와 문화 이론의 핵심 과제 가운데 하나는 문화의 개념 규정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문화의 정의에 따라 연구 대상의 범위와 내용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문화철학≫에서 카간은 문화를 존재의 한 형태이자, 인간 활동에 의해 형성된 ‘사회적 유전’ 기제로 정의한다. 동물의 행동이 이미 프로그램화되어 있고 생물학적으로 유전된다면, 인간의 활동은 유전된 본능뿐 아니라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정신적·물질적 대상의 습득 및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그 차이가 있다. 즉, 인간 활동의 산물은 인간 외부의 존재로 대상화되고, 그 산물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되며, 인간은 그 대상물에 담긴 ‘문화’를 습득하는 동시에 창조하는 주체로 거듭난다. 다시 말해서 문화는 대상화와 의사소통 활동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자질, 인간의 활동 방식, 그리고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든 창조물을 아우르며, 인간을 창조의 주체로 만드는 동시에, 역으로 그 창조물들을 통해 ‘인간’을 형성하는 사회적 유전 기제인 것이다. 카간은 이와 같이 문화를 특정 사물들의 집합, 가치, 제의, 양식, 정신, 상징 등의 세부 대상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저자는 문화를 내적 구성물 및 그 연관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체계로, 또 존재의 한 형태로 보고, 또 다른 존재 체계인 자연, 인간, 사회와 문화의 상호작용 양상을 다루고 있다.
모이세이 카간의 시너제틱 방법론
시너제닉이란 스스로 발전하는 체계의 조직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 복잡한 요소들로 구성된 체계의 구조와 기능 및 그 발전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체계론, 구조주의, 기능주의와 같은 접근법 및 열역학 제2법칙의 성과를 바탕으로 체계 발전의 비선형성을 강조한다. 러시아 학계에서 이것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망라하는 통섭적 연구 방법론으로 발전했다.
이와 같은 통섭 연구 방법론을 문화 분야에 적용한 것이 이 책이다. 책의 3부에서는 문화사를 다루고 있는데, 시너제틱의 연구 방법론을 인류 문화사의 발전 단계에 실제로 적용해 보이고 있다. 카간은 문화가 외부 체계와의 상호작용을 견지하면서도 그 발전의 논리는 내부에 있다는 자가 발전론을 주장하면서, 사회, 혹은 인간과도 다른 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한다. 인류 문화의 보편성을 거부하고, 각 민족 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한 슈펭글러의 문화관과는 달리 카간은 인류 문화를 통괄하는 발전 논리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문화사가 한 방향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비선형적 발전 원칙에 따라 전개된다는 관점을 고수함으로써 단일한 진화론적 문화발전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200자평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 이후 러시아 철학계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전일주의적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움직임이 강했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사회현상조차도 상호작용의 질서 속에서 움직인다는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모이세이 카간은 문화를 사회의 종속 개념으로 보았던 러시아에서 문화 자체에 대한 연구를 새롭게 정립했다. 난제에 대한 카간의 새로운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지은이
모이세이 카간은 1921년 키예프에서 출생,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1941년 2차 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4년에는 레닌그라드 국립대학 역사학부에서 예술사를 주제로 박사 과정을 밟았으며, 1946년에는 대학원을 수료했다. 그때부터 2006년 생을 마감하던 해까지 카간은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서 연구 활동에 헌신했고, 후학을 길러내는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카간은 미학, 존재론, 가치론, 역사, 문화 이론 분야에서 여러 단행본과 논문들을 남겼다. 다양한 예술 분야의 구조를 다룬 ≪예술의 형태학≫(1972), 문화의 본체를 이루는 인간 활동에 대한 체계적 연구인 ≪인간의 활동≫(1974) 등과 600여 편에 달하는 논문들은 인류 문화와 예술, 철학과 역사 등 폭넓은 분야에 걸친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더불어 현상과 본질을 꿰뚫어 보는 깊은 통찰력과 참신한 시각을 보여 준다.
옮긴이
이혜승은 한국외국어대학교 학부와 대학원에서 러시아어와 문학을 전공했다. 대학원 재학 중인 1994∼1995년에 교환학생으로 모스크바의 국제관계대학교에서 연수를 마쳤다. 19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사회학부에 입학했다가 같은 해 철학부 문화사·문화이론과로 옮겨 소비에트 문화를 연구했다. 모이세이 카간의 지도 아래 논문 <소비에트 해빙기 문화와 연극>으로 2001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외국어대학교, 충북대학교, 한국체육대학교 등에서 시간 강사로 재직했으며, 현재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1960∼1980년대 초반 사회, 문화적 상황과 관련해 본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변화 연구>(만화애니메이션, 2009), <1930년대 중반∼1980년대 중반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언론, 공연, 문학 작품에 나타난 문화적 지향성 연구>(역사문화연구, 2007) 외 여러 편이 있다. 저서로는 ≪지도 없이 떠나는 오리엔트 여행≫(청년정신, 2008), ≪모로코, 낯선 여행≫ 등이 있으며, 역서에는 ≪이스탄불에서 온 장미 도둑≫(아리프 아쉬츠 지음, 이마고, 2009), ≪러시아와 유럽≫(니콜라이 다닐렙스키 지음, 지식을만드는지식, 2009) 등이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서론
1부 문화와 존재 체계
1-1. 존재의 구조와 문화의 존재론적 위상
1-2. 문화와 자연
1-3. 문화와 사회
1-4. 문화와 인간
1-5. 문화 자체의 문제들
2부 문화의 구조와 기능
2-1. 문화 창조자로서의 인간
2-2. 대상화의 소통 과정
2-3. 문화의 창조물로서의 인간과 새로운 나선의 시작
3부 스스로 발전하는 체계로서의 문화
3-1. 문화사 연구 방법론의 원칙들
3-2. 인류 사회 문화 발생의 법칙과 초기 문화의 역사적 유형
3-3. 전통문화에서 창조 문화로
3-4. 현대 문화의 상황
결론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인간 활동의 사명은 세대에서 세대로, 종에서 개체로 행동 프로그램을 전달하는, 인간에게 이미 퇴화된 기제를 새로운 기제인 ‘사회적 유전’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축적된 인간 경험의 ‘대상화’(헤겔)가 필연적이다. 대상화를 통해 객관화되고 분리된 형태로-그래서 인간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지지 않는-인간이 획득한 지식, 가치, 기술을 보존할 수 있다. 비자연적 행동 방식인 인간 활동으로 인해 생물학적인 존재는 사회적이기도 한 존재가 된다. 그 결과 인간 활동은 새로운-제4의-존재 형태인 문화를 낳게 된다.
-32쪽